복층·반복적 풍경에 담긴 존재들, _그리고 시각 너머에서 발견하는 어떤 관점들
홍경한(미술평론)
1.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1) 는 비약적인 경제발전으로 인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시대에 접어들었다. 2) 지속적인 경제 성장으로 구매력이 높아진 기업과 개인은 상품을 무한정 만들어냈고, 그만큼 높은 소비의 가속도를 보였다.
인간조차 컨베이어벨트에 올라 선 획일적 존재로 강요받는 사회에서 축산용 동물을 소비하는 방식 역시 대량소비시대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비용을 아끼면서도 더 많은 고기를 생산하기 위한 공장식 시스템이 도입되었고, 저렴하면서도 속도감 있는 보급을 위해 유통업이 발달했다. 이것이 그토록 많은 계란과 닭과 소, 돼지 등을 가공한 ‘먹거리’가 끊이지 않고 우리에게 공급될 수 있는 배경이다.
문제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시대에선 동물의 사육방식의 인도적 측면과 복지는 계산되지 않기 일쑤라는 점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식용 가축은 비좁은 케이지에서 살고 죽는다. ‘뜬장’이라 불리는 공간에서 땅 한번 디디지 못한 채 대소변을 놓다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간다. 당연히 자율성 따윈 없다.
이처럼 인간이 이용하기 위하여 기르는 동물 중 많은 부분은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나 자란 후 인간의 식탁 위에 오른다. 심지어 수명이 10년 이상인 닭도 50여일이면 생을 다한다. 그렇다고 생명에 관한 윤리의식이 부여되는 것도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 안 된다 싶으면 가차 없이 도살하고 버린다. 잔인하게 머리에 바람구멍을 뚫어 죽이기까지 한다. 우리가 먹고 있는 육류의 진실은 그렇다.
작가 김경원은 이 지점에 주목한다. 도축대상 동물들에게 최소한의 동물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거나 공장식 축산시스템에 대한 관심을 조형의 계기로 삼는다. 공장식 생산 체제의 단면을 반복(Repetition)이라는 조형요소로 표현해 새로운 시각을 유도하며 비판적 3) 미학으로 자신만의 조형적 문법을 구축한다.
작가의 작업은 생산구조에 대한 지적과 대상의 전환을 되풀이 행위와 형태로 보여준다. 계란과 우유를 제공하고 식용이 되는 닭과 젖소들을 동일하게 겹쳐(중복과 반복, 반복에 반복) 꽃과 파도, 산과 같은 자연물로의 패턴(pattern)화 했다. 그 결과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주제임에도 시각적 리듬이 있고 경쾌한 여운까지 인다.
그러나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그 패턴 속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우선 일일이 수작업 4) 으로 진행되는 작품은 한결같은 경제적 생산방식과의 고의적 상치를 나타낸다. 다소 수월한 프린트나 사진이 아닌 그리기 방식을 선택한 건 이들에게 개체의 차이를 고지하고자 한 의도이다.
물론 투자 대비 수익성을 중시하는 시장의 논리로 생각하면 그 자체로 경제구조와 맞지 않다. 매우 비효율적이다. 그렇지만 길고 긴 노동을 수반하는 수작업은 개체들의 존재성을 거세시키지 않기 위한 작가의 바람을 보다 명징하게 만들고 메시지 추출에도 용이한 행위이다. 지난하지만 꼭 거쳐야할 과정인 것이다.
일련의 작품 중 눈길을 끄는 게 있다. 바로 김경원의 동물들은 한 결 같이 한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Re-production>(2017), <Daisy daisy>(2018), <Surge>(2018), <파동>(2019), <그곳에 가고 싶다>(2019), <봄바람>(2019), <Heart heart>(2020) 등의 작품을 비롯해 많은 작업 속 동물들의 형상이 한 방향으로 치우쳐 있다. 이는 밀집사육에 관한 시각을 담기 위한 장치이다. 유동성을 보장하지 않은 채 제대로 설 수조차 없는 공간에서 한곳만을 바라보게 만든 닭장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건 앞서도 잠시 언급한 패턴이다. 작가는 하나의 심미적 상황을 유도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동물들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려는 계획으로 패턴화를 선택했다.
다른 관점, 그것은 꽤나 성공적이다. 멀리서 보면 흡사 산수화처럼, 거대한 빌딩 숲처럼, 가상의 섬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Overlaping Waves>(2017), <Overlap A>(2017), <그곳에 가고 싶다> 등이 그렇다. 빛과 그림자로 인해 중층의 레이어가 형성된 설치작품 <Cycle cycle>(2018)은 시각적 패턴을 넘어 몽환적인 감정까지 선사한다.
여기엔 우리가 알고 있는 동물의 상황과 현실이 개입할 틈이 없는 대신 규칙적이지만 불규칙하며, 무질서한 가운데 질서 있는 광경이 놓여 있다. 따라서 보는 이들 또한 전혀 다른 관점으로 다가선다. 완성된 이미지는 거리에 따라 변화하고 관람자의 위치와 관점에 따라 다른 무엇이 된다. 5)
2. 예술가로서 능동적이고 지속적인 실험은 긍정적인 평가를 가능하게 한다. 김경원의 역대 작업을 보면 평면을 넘어 작업 흐름을 보다 폭넓게 확장하며 조형적 변화를 꾀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주제를 비롯해 형태의 중복과 반복은 최근까지도 유효하다. 다른 작업도 마찬가지지만 이와 같은 흐름은 도형 기호화 한 <Superstar>(2017)와 <Happiness>(2018), <aping rules_cow>(2020)에 이어 <Overlaping chicken>(2018) 등에서 고루 드러난다.
김경원 작업은 별이나 하트, 네모 또는 원 같은 도형을 통해 대상이 기호적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레이저커팅 6) 으로 제작된 입체, <Flying chickens>(2018), <Cycle>(2018)처럼 설치로까지 나아간다. 이 작업들도 형태의 반복과 복층의 구조를 지닌다.
이 중 입체작업에서 짚어봐야 할 것은 존재에 대한 작가의 시각이 한층 뚜렷이 투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7) 실재하지만 없는 것(혹은 무관심한)과 진배없는 대상들을 묘사하기 위해 텅 빈 공간을 중심으로 선으로만 구성해 존재의 감정이나 가치에 대한 우리의 무의식적 태도를 언급하고 있다. 나아가 사각의 프레임을 한 캔버스가 사육장을 뜻했던 것처럼 얇은 선과 판 형태로 제작된 입체 작업 역시 차갑고 냉랭한 공간 내에서 삶을 유지하는 동물들의 사육환경을 가리킴으로써 주제성을 더욱 명료히 살렸다. 8)
입체가 닭 모양의 스케치를 레이저커팅을 통해 기계적 획일화 시키고, 그와 같은 방식을 통해 동물들이 먹거리로 대량생산되는 공장시스템의 현실을 재현했다면, 설치 작업은 그 동물들이 보다 자유로운 영역으로 이동할 수 있길 원하는 작가의 바람을 담고 있다. 작가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존재하지만 존재감 없이 키워지는 현실에서 주체성 있는 개체로써의 환원을 투사하고 있다. 9)
재밌게도 설치에 있어 작가는 어떤 물질적 오브제로 생성되는 것을 포함해 무형의 그림자마저 반복과 복층 구조의 요소로 끌어들이고 있다. 분식적인 요소가 제거된 채 장소와 공간이 총체적인 하나의 환경을 이룸으로써 메시지의 전달력을 높였다. 또한 매우 미니멀하게 실루엣처럼 등장하는 최근 작업의 경우 인지의 영역을 극적으로 전환시키는 어법이 더욱 강화됐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에는 공장식 축산시스템에 관한 작가의 일관된 미적 태도가 녹아 있다.
그러나 무엇을 말하려는지 헤아릴 수 있는 조형과 그곳에 내재된 의미와 본질에도 불구하고 김경원의 작업은 장식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조형적 측면이 유독 강조되는 경향도 없지 않다. 즉, 대량 생산체계와 유통과정에서 비롯되는 동물이 처한 현실을 내용으로 함에도 시각위주로 재편되어 본래의 의미 있는 무게감을 희석시키는 아쉬움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도 이를 잘 알고 있는 듯하여 다행이지만 예술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염두에 둔다면 보다 자신의 작업이 어떤 결을 하고 있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물론 시각성의 확대가 대중적 인지도와 작품 구매도를 상승시킬 수는 있으나 그럴수록 호소력은 줄어들고 문제의식은 희미해진다. 더구나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공장식 축산 시스템이 결국은 돈 문제라는 점에서 이율배반적인 현상을 초래할 수도 있다. 자신의 작품이 문제적 관점에서의 해석이 아닌, 대중적 눈높이에서 소비되는 방향으로 가게 된다면 말이다.
1) 세계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대량소비시대란 미국을 중심으로 한다.
2) 월트 로스토(Walt Whitman Rostow)가 규정한 경제성장의 5단계 중 마지막 단계인 대중적 대량소비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3) 실제로 작가는 “작업 속에서 대상들을 몰 개성화 시키고 기계적으로 반복시킴으로써 공장화된 시스템을 비판하며 나아가 다른 대상으로 바라 볼 수 있도록 작업하였다.”고 자신의 작가노트에 적었다.
4) 굳이 수작업을 하는 이유에 대해 작가는 “손으로 그려진 하나의 완성된 동물은 그전에 그려진 동물과 같을 수 없고, 모여진 동물의 형상은 본인이 원하는 이념적 형상이며 그 안에서 그들은 진정한 가치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자신의 작가노트에 적고 있다.
5) 그래서 “관객은 작품을 직면할 때 도식적 형상(별, 하트 등)을 먼저 보고 더 가까이 다가서면 그 구성은 관계성이 적어 보이는 닭과 젖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마주한다.”는 작가의 발언은 합당하다.
6) 작가는 “레이저 커팅은 이들이 처해진 기계적 현실을 정밀하게 재현방법이다.”이라고 한다.
7) 이에 대해 작가는 “실체는 있지만 존재감 없이 키워지는 상황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차가운 철을 0.3mm의 얇은 판 형태로 제작 하였다.”며 “평면에서는 몸통을 모두 칠하여 보여주었다면 입체 조각에서는 몸통을 뚫어 라인 형태로만 커팅 하였는데, 이는 존재감 없는 그들의 현실이며 공허한 그들의 마음이기도 하다.”고 했다.
8) “닭의 텅 빈 심상을 표현하고 소재는 철소재로 하여 그들이 키워지는 환경적 무게감을 주었다.”는 게 작가의 말이다.
9) 이때 개체로 나온 닭은 공간에 따라 다른 곳에 있게 된다. 평면 대비 스스로의 원칙에 따라 유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개체를 공중에 배치하여 개체가 가진 의미와 가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