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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평론



버려지는 것들에 대한 장엄한 임종의 기록
이재언(미술평론)
‘묘사력 좋다’는 칭찬이 칭찬 같지 않게 들리는 시대이다.
디지털 시대 시뮬라크르가 차고 넘치는 세상이다. 특히 超고화질의 첨단 디스플레이 기술을 자랑하는 우리와 같은 미디어 기술환경에서 회화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이제는 전통적인 타블로 회화만으로 뭇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미디어에서는 고해상의 화질에 박진감 넘치는 동영상까지 장착하고 있어 고정적인 타블로 양식이 급격히 위축되고 있다. 더욱이 증강현실(AR)이나 가상현실(VR)을 증폭시키고 있는 기술 앞에서 전통 회화계는 고민과 우려가 쌓인다. 특히 비대면이 강조되는 상황이다 보니 IT 기술 적용의 시도들이 거대한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실 동시대 회화의 ‘재현’은 차별당하고 있다. 인류 시각예술 시원의 중요한 한 축으로서의 재현, 예술의 지평을 넓히는 진화와 진보를 위해 어느 정도의 억제는 용인될 수 있지만, 필요 이상으로 억제되고 차별받고 있다. 비엔날레 등 유수의 국제행사에서 미디어 이미지는 많아도 재현적 그리기 이미지의 작품은 거의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오늘의 미술이 보인 모순이 적지 않지만, 그 가운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묘사력’에 관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묘사력이 좋다”는 말은 칭찬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미술에서 상상력, 표현력, 모티브, 완성도, 서사, 개성, 참신성.... 등 많은 중요 요소들 가운데 묘사력은 그 자체 가치도 있지만 광범위하게 관련되기도 한다. 물론 재현도 여러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기는 하다. 전통적 필치를 고수하는 아카데믹한 재현과 극사실적 재현은 성격적으로 거리가 많다면 많다. 현상적으로만 보면 후기 미니멀이나 추상에 가까워 보인다. 그나마 현대미술의 문호는 극사실적 재현에 더 우호적이다. 그나마 상업적 시장에서는 묘사력을 앞세운 작품들이 여전히 유지되는 비중 덕에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느낌이다.

화가 오흥배는 이러한 기술적 도약과 발전의 소용돌이, 그리고 차별 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타블로에 붓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린다. 익히 잘 아는 전형적인 극사실적 양식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붓끝에 낭만적 감흥을 실어 대상의 리얼리티를 구현하는 전통적 재현은 아니다. 정적인 특징과 정밀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고전주의에 가깝지만, 어떤 절대적 이상화를 고집하지 않고 상대주의적 시각 질서를 견지한다는 점에서 ‘다름’을 유지한다.
작가의 초기 극사실 회화는 초점을 한 대상의 특정 부분에 두고 조금 과장이다 싶은 확대를 주로 소재로 삼았다. 피부(skin), 신체 풍경(body scape), 추상적 풍경(abstract scape) 연작으로서 특정 부위나 부분을 크게 확대하여 사실적 재현을 함으로써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대상의 정체를 몰랐다가 정체를 알고나면 반전의 감흥과 묘미를 느끼는 경우이다. 대체로 착시 효과를 응용하거나 차용했을 경우와 유사한 반응양식을 보인다. 또 하나는 과도한 부분적 확대가 대상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일상적 미감을 벗어나 ‘낯선’ 혹은 혐오스럽거나 기괴한 이미지로 경험되는 결과를 야기하는 경우이다. 후자로 인해 극사실주의는 비판성을 띤 리얼리즘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미 작가가 선택적으로 부분을 확대 재현할 때부터 ‘보는 것’의 흔들리는 지각의 실재, 결국 낯선 추상적 질서를 보여준 바 있다.
작가는 극명한 객관성을 기조로 하면서도 그것이 우리의 시각 질서와 습관 밖에서는 낯선 경험으로 인지되는 상대주의적 재현을 보여주곤 했다. 낯선 장면에 의아해하는 모습을 은근히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작가는 카메라 이상의 정밀하고 사실적인 재현성을 장착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는 사람의 ‘경험’과 ‘선입견’이 개입되어 있다는 전제 아래 수행된다.
여기서 선입견은 우리의 삶과 주관적 인식 속에 언제나 함께 하는 것이다. "모든 이해는 선입견에 의한 것이다“고 한 가다머(Hans-Georg Gadamer)의 말을 음미해 보자. '누구나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하게 옳은 의견'은 없으며, 주관적 섭입견과 선입견 간의 충돌, 갈등, 조정, 합의 등을 거쳐 진리의 상대주의적 근사치를 도출하게 된다는 언급을 ‘보는 것’에 적용해 보자.
가다머의 관점에서 ‘보는 것’조차도 선입견의 영향 속에 수행되며, 아울러 ‘보이는 것’이 현상으로 주어진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의 차이를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작가만이 예민하게 문화나 역사, 자라 온 환경에 따라 개인의 시각적 ‘다름’이라는 것을 중요한 화두로 제시하고 있다. 사진으로 치자면 동일한 피사체이지만 조금만 앵글이나 줌을 조작했을 때, 우리가 인지하는 결과가 크게 달라지는 것처럼 그림에서 그러한 일은 너무도 흔한 일이다. 동일한 구도나 형상임에도 불구하고 색을 바꾸거나 결을 바꾸기만 해도 판이해지는 결과를 우리는 흔히 보아왔는데, 이보다 더 정교하게 차이를 포착하게 됨을 화면에서 보여주고 있다.

한편 작가의 근작은 ‘to see, to be seen’, 즉 대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재현 대상을 사진의 피사체와 구분하고 있다. 후자는 원인과 결과가 분명한 기계나 기기의 기계적 작용의 산물에서 구현되는 것이다. 물론 작가의 화면은 붓으로 그리는 것이 분명하지만 앵글이나 배경 등은 사진을 참조하고 있는 느낌이다.
“본인의 작업에서 이런‘다름’은 일상적이고 익숙한 것에서 새로운 모습을 찾아가는 대상의 ‘다시 보기’로 나타나고 주관적인 시선을 확대된 소재와 극사실적 표현 방법을 통해 타자 즉 관객의 서로 다른 시선을 일상적이고 익숙한 것에서 “낯선 것”으로 보이게 하고 ”각자의 시선”을 통해 해석하게 유도하는 것이다.”(작가노트)
다름의 반영과 소격효과는 오히려 초기작 Skin이나 Body Scape 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근작에서는 ‘차이’의 전제가 희석되고 있는 느낌이 든다. ‘낯설게 하기’ 그리고 ‘각자의 시선’이라는 명제는 화면에서 그렇게 설득력 있게 어필되지 않고 있다. 특히 화병에 꽃이 꽂혀 있는 장면, 어두운 배경에 인공적 조명이 분위기를 자아내는 전형적인 정물 느낌이 강한 고전주의적 화면으로 다가온다. 바삐 살다 보니 무심코 지나치면서 발견되는 시든 꽃, 아무도 눈길도 주지 않는 꽃을 소재로 등장시키고 있는 점은 낭만적 분위기까지 띠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to see’ ‘to be seen’ 연작은 ‘차이’를 내장시키고 있다는데, 그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텍스트의 디테일은 무엇일까. 회화에서 작가와 관람자 간의 소통은 ‘보는 행위’와 ‘보이는 현상’의 상호작용에 기반한다. 양자의 현상 간 간극이 좁다는 것은 객관성과 확실성이 높아진다는 것이고, 간극이 넓다는 것은 객관성보다는 자율성과 주관적 해석의 여지가 폭넓게 열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가가 극한의 사실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자율성이나 아날로그적 주관성에 방임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의 오차를 기술적 영역 이상으로 좁힘을 의미한다.

관람자들이 작가의 작품을 사진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작가의 묘사 기량이야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탁월하다. 사진 이상의 일루전이라면 붓 터치가 망점이나 도트를 남기는 사진 이상의 완벽한 컨택을 시전하고 있음이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직접 그린 그림임을 강조하려 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한술 더 떠, 자신의 오리지널 그림을 사진처럼 멀티플로 복제하기도 한다. 자신의 그림을 사진과 호환시킴으로써 원본과 복제의 차이가 무력화된다. 유일성을 생명으로 하는 원본, 그리고 복수성을 근간으로 하는 복제본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의 무력화는 작가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짚어보아야 할 문제이다.
발터 베냐민이 말한 것처럼, 기술복제 시대에 복제 과정에서 예술적 ‘아우라’가 위축되고 손상되다는 것은 상식이다. 원본과 복제본은 엄연히 다른 것으로, 아우라가 다르다는 것이다. 형상의 문제 이전에 유일성이라는 것 자체가 영혼과도 같은 에너지로 자율성과 품격을 지니는 아우라는 당연히 중요한 조건이다. 그런데 작가에게 그러한 구분이 다소 희석되고 있다. 일루전의 범주에서 ‘사진=그림=복제’가 순환되는 싸이클이 다소 파격적이다. 그렇다면 유일성과 복수성 사이의 동일성과 별개인 ‘다름’ 혹은 ‘차이’는 어디에서 존재하는 것일까.
다시 ‘차이’의 문제로 돌아와 보자. 사진이든 그림이든 차이를 결정지어주는 것은 인지의 차원에서 대상의 정체와 그것의 내러티브 해석으로 압축된다. ‘무엇’이냐의 문제인 대상의 정체가 ‘루빈의 도형’처럼 해석의 지향성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이상은 모호성만이 아니라면 차이를 허용하거나 기대하기가 어렵다. 결국 내러티브의 해석만 남는다.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는 어떤 담화와 해석을 도출해내느냐로 귀결된다. 작가가 이러한 파격적 싸이클 속에서 소통하고자 하는 바, 즉 내러티브는 무엇일까. 근작에서 주목하는 대상은 ‘시든 꽃’이다. 그 어떤 인지의 차이를 허용치 않는 명약관화한 ‘꽃’이며, 또한 이제 막 피어오르는 꽃 혹은 싱싱하게 살아 있는 꽃으로 오인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그저 ‘시든’ 꽃이라는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다. 동일한 자극에 대한 반응이 얼마나 다양하고 상이하게 나타나는가는 굳이 심리학을 조회하지 않아도 상식적 차원에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대상을 바라보는 관찰자들의 의식이나 감정에 나타나는 반응의 일반적 양상은 무관심, 쓸쓸함, 사소함, 하찮음, 낙조 등이며, 추함이나 혐오스러움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휴식, 수면, 삼라만상의 이치, 새로운 생명의 기약....
“시들고 마른 꽃은 생명을 다한 죽음의 모습일 수도 있지만, 본인에게는 시간과 공간을 간직한 또 다른 생명의 존재라고 인식되었다.” 작가 자신의 시각은 엄연히 공간 속의 존재이며 그 역시 생명의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화면은 망자에 대한 의식을 집전하는 것처럼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띤다. 물론 작가가 그러한 감정이나 입장을 가지고 있다 해서 그렇게 해석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다. 어떤 지점을 설정하되 그것의 지각과 해석은 앞에서 말한 선입견이나 경험에 따라 흐르는 물처럼 다가오기 마련인 것이다. 무심코 자행하는 외면이나 모진 단호함 등의 행위를 나무랄 일도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자율성과 차이는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리이다.

어떤 점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꽃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기보다는 언제나 소품이며 조연이다. 그것의 향기까지 곁들여진다면 극치 중 그만한 극치가 어디 있겠는가. 생기가 한창일 때는 한 우주의 열림으로까지 노래하곤 한다.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 나도 가만 눈을 감네.
(「개화」, 이호우 시조詩)

하지만 그것의 기능이 상실될 때 가차없이 버려지는 것이 꽃의 운명 아니던가. 인간이 버린 것이 아니라 자연이 도도하게 무대의 뒤로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감상적일 수도 있다. 개화가 감정이입에 열려 있는 만큼은 아니어도 죽음 또한 그러할 수 있다. 아름다운 죽음도, 예쁜 이별도 없다지만, 이 현상을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반성하고 해석하는 여유를 촉구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이 문화의 본질이자 순기능이기도 할 것이다. 한때 화려했던 꽃의 종말과는 대조적으로 크리스털 꽃병이 변함없이 영롱하고 매혹적이어서 더 낯설다. 요컨대 그의 시든 꽃 그림은 무언가를 남기고 떠나는 것들에 대한 경건한 합장이다.

....괜찮아요, 이제 다 괜찮아요 / 내가 세상에 태어난 날처럼 / 나 혼자가 된 것뿐이에요. (선우미애 시인의 「꽃 지던 날」 중)

우리 화단에서는 극사실주의 양식이 사조로 유입되기 전부터 유형과 미학의 차이는 있지만 이미 어느 정도 자생적 양식으로 정착해 있었다. 서구의 몰개성적 극사실주의와는 거리를 둔 부드럽고 서정적이며, 아카데미즘 회화와 혼합된 재현의 양식으로 존재해 있었다. 그러한 혼합적이고 절충적인 재현 회화는 어떤 사조가 유입되어도 주체적 수용이 가능하게끔 기능을 하기도 했다.
아카데미즘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특히 데생을 중시해온 교육환경도 한 몫을 하였다. 우리 화단의 극사실주의가 지금의 5, 60세 연령대의 작가들에서 특히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라는 이름의 환경은 뚜렷한 이유 없이 차별을 자행하였다. 당연히 상생과 상호작용의 파트너여야 할 재현 회화가 차별을 받는다는 것은 문화 생태계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시점에 오흥배의 존재는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세대가 하이퍼리얼리즘의 세례를 받은 것도 아닌 듯하지만, ‘그리기’의 가치와 비전을 키우고 있는 청년작가의 존재라니 반가운 일이다. 특히 그리기로 소통하고자 하는 진지함, 그러면서도 그리기만을 능사로 여기지 않고 내러티브로 승부하고자 하는 도전의식이 청년미술의 건강함을 보는 것 같아 또한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