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용 작가론: 조각적인 조각의 활보
오정은(미술비평)
활보하는 조각
파란 봉고 트럭이 화물칸에 여러 조각 작품을 싣고 시내를 달린다. 곁을 지나는 차량, 인근을 통행하는 행인이 알아볼 수 있도록 포장 없이 실린 이들 작품 중에는 유명한 만화 캐릭터 스폰지밥을 닮은 FRP조각이 있다. 특유의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트럭 난간에 걸터 앉아있는 이 조각의 입에서는 연신 비누방울이 뿜어져 나온다. 이는 강원대학교 조각 전공자들이 모여 만든 단체 ‘거푸집’이 화이트 큐브의 전시장을 벗어나 트럭에 작품을 싣고, 춘천시 일대를 이동하며 관람객을 찾았던 《도로 위를 활보하는 조각들》(2016.10.20.~10.24)에 참여한 이덕용의 작품이다.
이덕용 작가의 비평 글을 쓰면서 나는 <스폰지밥>에서의 비누방울에 대해 먼저 생각했다. 그것은 소위 ‘활보하는’ 전시의 기획에 관한 매우 상징적인 메타포로서의 조각이자 특정 형태의 참여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야외 주차장과 도로를 전시장으로, 트럭 화물칸을 조각에서의 좌대로 설정하고 이루어지는 수행적인 전시의 문법에서, 이덕용은 자동차의 속도와 장소에 이는 바람에 따라 움직이며 관람객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매체를 생산하는 데 탁월한 아이디어를 발휘했다. 그런데 그것은 어떠한 조각일까? 이 움직이는 전시의 맥락에 결합된 비누방울은 투명한 구의 형태로 주조되어 나타났다 사라지고, 금방 복제됐다가 이내 또 사라진다. 최근 메이커스 문화의 발달이나 ‘조각’을 너머 ‘조각적’인 것으로 확장되는 미술에서의 경향성을 참조하며 이덕용의 ‘조각론’을 더 들여다보는 것으로 나는 이 의문에 직면해가고자 한다.
작은 것들의 조각
이덕용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Little things Series>(2015~)는 작은 유리병 안에 미니어처 조각을 넣은 것으로 그에게 두 번째 개인전이던 춘천 아르숲갤러리 게릴라 모듬전(2015.12.19.~12.25)과 이듬 해 장은선 갤러리 초대 개인전(2016.12.21.~12.27)에 전시한 연작물이다. 개수로는 일백여 점에 달하는 이들이 탄생된 배경에는 작가의 당시 실생활이 관련되어 있다. 가용면적이 좁은 레지던시에 입주하게 된 이덕용은 작업의 재료와 크기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이전에 해오던 인체 모델링이나 학풍이 벤 작업과 결별을 원하고 있었다. 그 즈음 그는 ‘길을 걷다 문득, 나를 올려다보는 작은 사람(조각)을 발견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하는 의문에서 손가락 마디만한 작은 사람을 조각해 투명 유리병에 넣은 것을 작업실 앞 담벼락에 두고 관찰했다. 작품은 이내 원 장소에서 이동되거나 분실됐지만 그는 이 ‘반응’을 흥미롭게 생각했다. 이에 대한 작가의 회고적 언급은 내게도 흥미로운 지점인데, 관람객이 조각을 보는 방법에 관한 그의 태도와 의도가 짐작가기 때문이다. 어쨌든 작품을 사라지게 한 어느 관람자의 관심 및 욕망 행위는 이덕용이 이후 이러한 작업을 본격화하게 된 계기가 됐다.
디오라마와 같이 축약된 세계가 유리병 안에 축조된다. 발견된 사물이자 레디메이드 제품인 각종의 수집재료가 작가의 손에서 조각의 매체로 탈피된다. 초현실주의 회화나 동화 속에 나올 법한 나른한 풍경과 의인화된 동물이 등장하기도 하고, 현실의 정치·사회적 이슈가 은유적으로 담기기도 한다. 춘천 레고랜드 테마파크 조성사업상의 문제, 과거 대통령 비선실세를 풍자한 매우 현실참여적이고 비판적인 조각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Little things Series>라는 비표현적으로 일관된 명제가 말하듯, 실재의 엄격한 재현보다는 기의의 해석이 자유로운 하나의 기표적인 조각으로 드러나고 있다. 미니멀 조각은 아니지만 무수한 이야기를 연상하고 상상할 수 있는 형상의 이미지로서, 이덕용은 느슨한 서사와 조형이 맞물린 구조를 추구함에 가깝다. 그러한 구조는 비누방울, 스노우볼 같은 유리병의 투명한 레이어가 갖는 상징 이미지처럼, 조각이 설치되고 전시되는 과정에서 관람객이 각자의 시선에서 보고 해석할 자율적 의지를 투과해 열어주고 확장한다.
1984년 이후 20여 년 간 복개됐던 약사천을 춘천시가 복원하면서 여기에 설치된 이덕용의 공공미술조각 <약꽃>(2019)은 파란 눈에 미색의 몸을 가진, 가상과 현실의 경계에 있는 듯한 꽃사슴이 목을 숙이고 물을 마시려는 동작을 브론즈 캐스팅으로 구현한 것이다. 맑게 흐르는 약사천의 수면 위에 비치는 사슴의 얼굴은 주조되어 굳은 조각에 대응하는 것이자 실재 이면의 형상으로 흔들리는 물결에 따라 시시각각 드리워지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흡사 <Little things Series>의 유리막처럼 투명한 레이어 사이로 미끄러지듯 흘러 다니는 작은 조각의 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상대적인 조각
<상대적인 상대>는 이덕용이 2015년 일본 나요로 국제눈조각대회에서 1위를 수상한 대형 눈조각에 붙인 이름이다. 무릎을 구부리고 웅크려 앉아있는 거인이 자신을 마주보고 있는 작은 여인에게 한 손을 뻗어 그 손이 여인의 머리 위 지붕이 되어주며 교감하는 형상으로, 이덕용 특유의 판타지적 상상력이 가미된 작업이다. 이 조각은 같은 크기의 푸른색 에어 피규어로 매체를 변용해 2020년 강원대학교 앞 골목 등 국내에서도 선보여졌었다. 다만 거인과 마주보고 서있던 여인상을 삭제하고 이 자리에 실제 관람객이 들어가 거대한 작품의 일부가 될 수 있도록 고안했다. <상대적인 상대>에는 크기의 크고 작음이나 인간과 다른 이종 사이의 차이, 우월한 자의식과 낮은 자존감에 이르기 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상대적인 입장과 가치를 고민한 이덕용의 생각이 반영됐다고 할 수 있다. 이덕용이 2015년 조각한 이와 동명의 다른 작업을 보면, 의복을 착용한 신체와 아무 것도 입지 않은 누드를 하나의 인체상 위에 혼용하거나, 상반된 감정의 두 표정을 조각과 컬러링의 기법적 표현으로 얼굴 하나에 중첩시켰고, <무제>(2013)로 일컬은 작업에서는 피부색을 바꾼 백인과 흑인 두상을 서로 마주보고 있게 하여 주제의식을 부각한 바 있다. 그에게 있어 가업의 상징인 나무 캔버스 패널 위에 주저앉아 고개 숙여 실존을 고민하는 남성의 모습 <언젠가 아버지가 될 화가의 아들>(2011)은 야외 땅바닥에 설치되었는데 그의 정신적 뿌리와 현전의 대비가 돋보였다. 그가 작업을 하던 초기에 주로 몰두했던 자소상은 당시 몰입해있던 자전적 고민과 그것의 투영을 짐작하게 되는데, 서로 이질적인 것을 배합하거나 직면해 보이도록 하는 과정은 추후 그의 ‘조각’이 저 자신의 인습을 탈피해 ‘조각적’인 것과의 대응을 이루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볼 만하다.
이덕용에게 있어 창작에 방해가 되는 작은 작업실 면적의 한계는 이전보다 작은 작업을 만들어냄으로써 상대적인 극복이 됐다. 여행과 피난 등 잦은 이동으로 작업에 유동성을 부가해야 했던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자기 작업과 파운드 오브제를 미니어처로 만들어 가방에 담고 다녔던 <여행가방 속 상자>의 제작 배경과 같이 말이다. 뒤샹이 긴 시간을 들여 수공예적 작업으로 320개에 달하는 여행가방을 만들어 거기에 담은 것은 원전의 복제이자 삶의 여건이 반영된 예술의 현실적 대안이었다. 이 미니어처에 상대적으로 대응하는 원본은 복제품과 얇은 경계, 앵프라맹스(Inframince)를 사이에 둔다. 나는 이 개념을 이덕용의 조각과 조각적인 것 사이에 있는 얇은 피막과 같은 개념에 차용해 생각한다. 그것은 서로를 대립시키는 동시에 지지하면서 존재하게 만들고 수시로 투과하고 상호 연결되어 유동의 조각이자 관객참여형 작업으로 장르를 횡단하게끔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에어 피규어로 제작된 <상대적인 상대>은 거인의 손바닥 아래 난 투명하고 얇은 비가촉적 막을 관람객이 가로질러 들어가 스스로 조각적인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는 실제 조각에 대응해 활보하고 움직이는 작은 조각이자 조각을 완성시키는 지지체이기도 하다. <Little things Series>가 추후 대형 크기로 변용될 가능성이 있음을 고려하면, 여기에 적용될 조각적 상황의 상대적 전유도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한 일이다.
조각적 지지체
이덕용의 조각에 쓰이는 유무형의 재료와 이 것이 놓이고 전시되는 장소 환경의 범주, 그리고 동시간적으로 드러나 보이는 어떤 개념의 혼종을 본다. 이를 통해 로잔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의 기술적 지지체(technical support) 개념과 포스트-미디엄 조각론의 수용 하에 작가의 동시대적 위치를 가늠할 수가 있다. 단순히 크기와 매체의 변주를 너머 캐릭터의 키치적 전유와 저널리즘적인 풍자, 해석되는 네러티브의 종횡, 장소 특정적·비특정적 환경조각의 범용에 이르게 된 그의 조각은 동시대가 오늘 마주보며 고민해온 미술의 어법 안에 들어가 있다. 이에 더해 이덕용이 지역의 청년문화 활성화 사업이나 마을재생 사업의 기획에 참여하고 제품을 만들며, 유튜브 채널(‘춘천부부’)을 운영하면서 작품의 메이킹 필름이나 작가 브이로그 같은 영상을 게시하고 있는 근래의 활동은 조각가라는 직업 및 조각 장르로 포섭되는 기성 장르의 구획을 모호하게 하면서 현 시대 예술인의 현상담론과 포스트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인식을 덧붙이거나 참조하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작품은 작가를 대변한다’는 자기 신조를 읊는 그인 만큼 작업과 생활, 연습과 실전, 조각과 그 조각을 조각이게 하는 기술적 지지체 사이의 앵프라맹스는 상대적인 서로를 투과하고 유동적으로 보이게 한다. 이덕용은 자신의 작업을‘방황’혹은 ‘불확실성’으로 표현하지만, 나는 그것이 동시대 조각에서 환영이 제거된 상태로 자기 분열을 거듭하며 생존을 모색하는 조각적인 것의 편린이라고 생각한다. 이 심오한 결론은 그러나, 주체적인 감상과 참여가 가능한 개방적 구조를 부르고 기념비로서의 조각을 일어나 움직이게 하며 그것의 현대적 미의식을 새롭게 청구한다는 면에서 자율성을 확보한다. 크라우스가 「Under Blue Cup」(2011)에서 빗댄 표현대로, 수영장의 벽은 저항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지지대로 하여 앞으로 박차고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다. 이덕용에게 조각적인 것은 벽채를 사이에 두고 그의 조각을 지지하며 대변한다. 이에 대한 확증은 그의 추가적인 활보를 통해 증명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