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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평론



장우진 작가론
김병규(영화평론)
지금까지 세 편의 장편영화를 만든 장우진 감독의 첫 번째 영화 <새출발>의 초반부에는 꽤 기묘한 공간의 연결을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대략 이런 장면이다. 너덧 명의 대학생들이 미세한 조명이 밝히는 어두운 방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있다. 누군가 돌연 어느 선배의 자살에 대해 말을 꺼낸다. 예기치 않게,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문제가 도래한다. 관객은 이야기의 당사자인 선배가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절대 자살할 법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뒤늦게 대사로 들려오지만, 죽음의 전모는 밝혀지지 않는다. 모두에게 선망받던 선배의 급작스러운 자살이라는 소식은 순식간에 분위기를 얼려버리고, 인물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박차고 문밖으로 나가기에 이른다. 이 장면의 마지막에 주인공 지현(우지현)도 친구를 따라 문밖으로 나가게 된다. 이상한 느낌을 자아내는 건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장면에서다.

카메라는 인물들이 빠져나간 문 바깥의 공간을 보여주지도, 문을 열고 나선 지현을 따라나서지도 않는다. 대신 우리가 마주하는 건 또 다른 문 앞에 서 있는 혜린의 모습이다. 화면은 직전 장면보다도 더욱 어두워 이 공간이 조금 전까지 함께 술을 마시던 공간과 같은 곳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렵다. 그때 뒤쪽에서 문이 열리고 지현이 들어온다. 이윽고 두 사람의 키스가 이어진다. 확인되지 않은 인물의 자살과 예정에 없이 마주친 이들의 키스가 몽타주를 이룬다. 화면 바깥의 죽음과 프레임 중심부를 차지한 성애적 순간. 지현은 바깥으로 나간 것일까, 또 다른 안으로 들어온 걸까. 외부로 벗어난 걸까, 내부에 머무른 것일까.

이런 의문은 <겨울밤에>의 한 장면에서도 비슷하게 떠오른다. 길을 헤매던 흥주는 청평사 근처 숙소로 돌아와 유리창을 통해 홀로 깨어 있는 젊은 여자(이상희)를 바라본다. 그런데 다음 순간 조명이 꺼지고 창문에 비치는 건 흥주 자신의 얼굴이다. 흥주는 어떤 자리에 도달한 걸까. 그가 서 있는 곳은 바깥인가, 안쪽인가. 이 인물들이 직면하는 경로는 물리적으로 명쾌하게 설명되는 대신 하나의 영화적 ‘간격’을 만들어낸다. 공간과 다른 공간 사이에, 하나의 문과 또 다른 (창)문 사이에, 여기와 저기 사이에, 쇼트와 다음 쇼트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을 말이다. 장우진의 영화는 그런 세밀한 간격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임시적인 형상에 카메라를 가져다 댄다. 우리는 이야기가 아니라 영화의 간격에서 장우진적 세계의 매혹을 발견하게 된다(DMZ 철창 너머로 보이는 북한의 풍경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을 2채널 스크린으로 구축한 설치 작품<Shot Reverse Shot>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장우진의 주인공들은 폐쇄와 개방의 경계면을 걷고 있다. 장우진의 카메라는 차분하게 현재를 주시하지만, 그 현재의 표면 위로 과거의 흔적이, 다가올 불안이 침입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현재가 오직 현재로만 유지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럼으로써 기억과 불안의 침투를 피할 수가 없다. 앞서 언급한 장면들의 구조가 흥미로운 감각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장우진의 인물들에게 주어진 영화적 공간이란 그 자체만으로 종결되지 않는 세계, 한편으로는 열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닫혀 있고, 또한 닫힘으로부터 새로운 열림이 생성되는 세계다. 장우진은 영화의 프레임을 그러한 이중적인 운동이 오고 가는 입방체처럼 다룬다.

<겨울밤에>의 첫 쇼트는 이런 문제를 예증하는 사례다. 택시를 탄 부부의 모습을 정면에서 주시하는 이 장면은 시각적인 구성으로만 두고 보자면 지극히 단순하고 평면적이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은주가 핸드폰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 간결한 장면에 서로 다른 두 개의 방향성이 전제된다.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멈춰서 뒤로 돌아갈 것인가. 이 질문은 표면적으로는 현재의 공간과 핸드폰을 잃어버린 청평사를 지칭하는 것이지만, 장우진 영화에서 범위를 넓혀본다면 춘천과 서울이라는 두 개의 지역, 춘천에 방문한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춘천, 춘천>), 청평사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네 인물의 현실과 무의식(<겨울밤에>)의 경계면을 관류하는 영화적 긴장을 형상화하는 문제의식으로 확장된다.

‘잃어버림’이라는 신호 일본의 영화감독 요시다 기주는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에서 노부부가 도쿄에 가기 위해 짐을 챙기는 장면에 나오는, 잃어버린 공기베개를 찾는 아내의 사소한 제스처에 대해 언급한다. 잠시 눈에 보이지 않다가 금세 다시 나타나는 공기베개는 이야기의 전체적인 맥락이나 대화의 전개와는 하등 무관하지만, 순간적으로 영화 화면에 부재와 나타남이라는 지각적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는 부재 자체의 감각을 영화에 드리우며 끝내 아내의 죽음이라는 극적 결말과 연결된다고 요시다는 말하고 있다. 부재와 나타남을 가로지르는 사물의 효과가 영화 전체를 응축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어느 정도 수사적 과장이 섞여 있기는 하지만, 부재와 나타남을 오가는 사물의 힘으로부터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원리에 가닿는 이 견해에는 매혹적인 설득력이 있다. 물건을 분실하는 사태는 서사적 진행과 별개로 영화라는 세계가 근원적으로 내재한 망각과 분열, 기억 상실의 감각을 되돌려주는 신호로 작동한다. 무언가를 찾는다는 건 대단히 전통적인 플롯의 방법이기도 하지만, 요시다가 언급하는 부류의 사라짐과 되찾음은 서사의 질서로 흡수되지 않는 표상적인 얼룩에 가까운 것이다. 오즈 야스지로뿐만 아니라 에드워드 양과 홍상수, 아핏차퐁 위라세타쿤과 구로사와 기요시 또한 얼룩처럼 남겨진 분실의 감각에서 영화의 핵심적인 원리를 발견하는 작가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장우진의 영화에서도 길 위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가방을 잃어버리는 <새출발>의 혜린, 핸드폰을 잃어버리는 <겨울밤에>의 은주. ‘잃어버림’에 대한 자각은 인물들에게 방향감각을 잃게 하고, 영화에 일탈적인 궤도를 도입한다. 이러한 얼룩이 가장 두드러지는 영화는 <춘천, 춘천>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춘천으로 돌아온 세 인물은 그곳에서 망각과 상실, 극복할 수 없는 변화에 직면한다. 영화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서울에서 직장을 알아보다 고향 춘천에 돌아온 지현은 우연히 마주친 친구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고, 과거의 기억이 깃든 공간 대부분이 철거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서울에서 춘천으로 여행을 떠나온 중년의 커플은 예전에 경험한 춘천 여행의 추억에 대해 말하지만, 그들의 눈에 비친 같은 풍경은 전과 같지 않다.

장우진의 인물들은 영화적 간격을 좁히거나 벌리는 과정에서 위태로운 변형을 거듭하는 유동적 주체에 속한다. <춘천, 춘천>의 지현을 둘러싸는 이미지의 질감을 떠올려보자. 그는 어두운 밤에 실루엣으로 포착되는 회화적 풍경 이미지의 일부이기도 했다가, 얼마 뒤에는 실제로 김치를 담그는 사람들과 함께 둘러앉아 다큐멘터리적 순간의 한 부분을 이루기도 한다. 이처럼 변모하는 풍경은 인물들과 분리할 수 없다. 실제로 장우진의 영화들은 현장의 우연과 즉흥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회화적이고 사진적인 구도를 구축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장우진의 영화는 모두 로드무비의 외형을 지니지만, 중요한 것은 결정된 목적지가 아니다. 가령, <새출발>의 지현과 혜린의 여정에서처럼 목적지는 해안가에서 동굴로 급작스럽게 변하기도 한다. 여정은 그런 불확실성으로 감싸인 세계의 질감을 향해 몸을 던지는 시간이다.

장우진의 영화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사태는 평면적인 현재 위로 이중의 시간을 덧대는 작업이다. ‘잃어버림’에 대한 자각은 지나온 길을 다른 시각으로 되돌아보도록 이끈다. 이 시선의 성찰은 우리가 파악하기도 전에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현재의 시간에 이중의 질감을 형성한다. <새출발>에서 지현과 혜린의 여정 두 번째 날이 시작될 때, 카메라는 거울에 비친 왜곡된 두 사람의 모습을 담아낸다. 사라짐과 탐색이 발생함으로써 인물들은 주어진 경로에서 이탈하고, 굴절된 움직임을 프레임에 도입한다. 장우진의 여정은 그렇게 주인공들을 변형시키며 그들은 감싸는 현실의 공기를 체감케 한다.

빛, 깜빡임, 영화 장우진이 창안한 여정, ‘잃어버림’과 ‘되찾음’의 몸짓이 서로 뒤엉키며 일탈적 궤도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단순히 예술적 형식을 실험하는 피상적인 시도로 이해해선 안 된다. 그는 이 변형의 과정에서 불쑥 출현하는 영화의 자리를 발견하려는 연출자이기 때문이다.

<새 출발>의 초반부는 20분 넘게 밤 장면들로 이어진다. 이토록 대담하게 어둠을 정착시킨 영화는 보기 드물다. 다소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런 어둠의 침입을, 암흑으로 잠식된 쇼트의 상태를 두려워하지 않는 데서 장우진의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둠은 빛의 잔상을 화면에 각인시키는 강렬한 기제로 다가온다. 어둠을 밝히는 담뱃불,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불빛, 미세하게 얼굴에 묻는 빛…. 찰나에 스쳐 지나가는 형상들이지만 그런 예민한 빛의 움직임과 잔상으로 영화는 놀라운 생명력을 획득한다. 이로부터 생성되는 화면의 생동감은 인물들의 현실에 부여된 우울과 곤경을 초과하는 장력을 일으킨다. 춘천의 풍경을 바라보며 무기력과 상실에 가로막힌 <춘천, 춘천>에서도 한순간 빛을 발견하는 쇼트가 찾아온다. 흥주와 세랑이 청평사의 술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장면이 그러하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이 장면에는 잊기 힘든 감흥이 새겨져 있다.

막걸리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을 포착하던 카메라는 어느 순간 비닐 천막 틈새로 새어드는 빛에 반응하기 시작한다. 이 빛은 주기적으로 카메라 렌즈에 붙잡혔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화면을 밝히고 또 어둠에 잠기게 한다. 이때 세랑과 흥주는 그들이 경험한 춘천에서의 옛 기억을 떠올리면서, 1부의 지현이 청평사를 내려오면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느닷없이 나타난 사마귀를 목격한다. 이 순간은 마치 말과 몸짓을 나누는 인물들의 서사와 빛과 그림자를 교차시키는 풍경의 서사가 동시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빛과 그림자의 교차는 영화를 추동하는 깜빡임이라는 형상으로 펼쳐진다. 장막을 통해 스며드는 빛과 어둠의 전환을 달리 말할 수 없다. 그 물질들의 총체는 극장 스크린 위로 펼쳐지는 영사 행위를 떠올리게 한다. 이 장면의 감흥을 잊기 힘들다면, 그건 영화를 이루는 물적 조건 없이 영화라는 비가시의 형태가 우회적으로 구현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크린과 영사기의 기호를 연상시키는 비닐 천막과 그 틈을 파고드는 빛의 윤무가 없었더라면, 1부와 2부를 잇는 구조적 몽타주의 가능성도, 과거의 기억을 현재의 충만함으로 덮어씌우는 깜빡임의 출현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임시적인 조건의 집합으로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 영화의 잠재적 풍경을 목격하게 된다.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에는 “영화가 발명된 이래로 사람들의 수명은 세 배로 늘어났다.”라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여기서 지시되는 의미는 하나의 삶이 세 배의 시간을 획득했다는 뜻이 아니다. 대신 우리가 얻은 것은 현실의 삶과 영화(이미지)의 삶,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통과한 제3의 삶이다. <새 출발>의 거울에 비친 뒤집힌 쇼트가 그러하듯, 장우진의 영화에서도 서로 다른 복수의 삶의 질감이 펼쳐진다. 그의 영화적 여정이 다른 삶의 형태를 가늠해보는 과정이라면, ‘영화’라는 다른 삶의 구축을 위해 깜빡임의 신호들이 필요한 것이다.

<겨울밤에>의 마지막, 첫 장면에서와 마찬가지로 흥주와 은주는 택시를 타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하지만 청평사에서 밤을 보내며, 자신과 흥주의 과거처럼 보이기도 하고, 자기 기억의 조각처럼 보이기도 하는 젊은 남자와 여자를 마주친 은주는 전과 다른 선택을 한다. 그녀는 잠시 택시를 세우고 흥주와 도로에 나란히 선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또 다른 깜빡임의 신호들을 본다. 뒤편에 선 자동차의 깜빡임, 사물처럼 멈춰 선 은주의 눈 깜빡임, 그리고 두 사람이 나란히 선 모습과 석탑이 무너지는 무인의 풍경을 교차편집하는 영상의 깜빡임. 깜빡임으로 장면이 바뀌고, 영화의 형태가 만들어진다. 그것은 또한 이전과 다른 삶을 예고하는 짧은 신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