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재미 있어야 한다”생애와 연극 입문
이영철은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당시 춘천의 소양극장, 아세아극장, 신도극장 등은 지역 문화의 중심지로 기능하였고, 그는 영화관을 통해 문화와 처음 접하게 되었다. 당시 소양극장 극장주 아들과 친구관계라 영화를 비교적 자유롭게 접할 수 있었으며 이때 문화적 감수성을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중·고등학교 시절까지는 연극과 특별한 인연이 없었으나, 춘천교육대학교에 진학하면서 그의 삶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춘천교육대학교 입학식 당일 입학생을 축하하는 공연으로 춘천교육대학교 연극동아리 극회 석우의 공연을 관람하였는데 순간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고, 이후 극회 석우에 입단하여 《개방병실》이라는 작품에서 사진기자 역할로 첫 무대에 올랐다. 당시 대사는 고작 13마디에 불 과했지만, 그는 극심한 긴장으로 몸살을 앓았다. 그럼에도 그 첫 경험은 두려움보다 기쁨으로 남아 있으며, 지금도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회고한다.
연극 수업과 서울에서의 배움
춘천에는 연극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교육 환경이 부족했기에, 그는 직접 서울로 올라가 연극 서적을 탐독하고 실험극장과 명동극장 등에서 공연을 관람하며 연극을 공부했다. 특히 실험극장의 《에쿠우스》는 그의 인생을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연극이라는 예술 장르에 몰입하게 되었다.
서울 연극계의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무대와 무대 뒤편의 현장을 관찰했고, 이를 통해 연극 제작의 전 과정을 익혀나갔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연극에 접근하는 태도와 예술적 관점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극단 ‘굴레’ 창단과 지역 연극의 실험
1974년, 춘천교육대학교 졸업 후 발령 대기 중이던 그는 교육대학교 극회 석우의 동기들과 함께 극단 ‘굴레’를 창단하였다. 기존 연극이 현실주의나 계몽 중심의 극 형식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는 보다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양식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굴레의 창단 공연은 칼 비트링거 작 《은하수를 아시나요》였으며, 이후 다양한 공연을 통해 새로운 지역 연극 언어를 모색하였다.
창단 초기에는 연습 공간이나 제작비 마련조차 쉽지 않았고, 공연을 할 때 마다 공연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후원을 받으러 직접 상가를 돌며 후원자를 찾기도 했다.
창단 작품 《은하수를 아시나요》는 전후 문학을 다룬 작품으로 다소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었다. 총 90분가량의 러닝타임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약 4일간 공연되었다.
공연 이틀째 되던 날, 故 이외수 작가와 오전부터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자연스럽게 술자리가 이어졌고, 공연 직전까지도 대화를 나누느라 약간의 취기가 남아 있는 상태였다. 무대에 올랐을 때 긴장한 탓인지 스스로 혀가 꼬이고 발음이 부정 확하게 느껴졌고, 이를 만회하고자 몇 차례 대사를 반복하며 공연을 이어갔다.
공연을 가까스로 마친 후, 상대 배우로부터도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고, 본인 스스로도 깊이 반성하며 ‘다시는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이 경험은 당시 연극을 했던 청춘의 낭만이자, 지금 돌이켜보면 시절의 한 단면으로 남아 있는 기억이다.
소극장 개관과 지역 연극 생태계 구축
1989년, 그는 청소년 대상 순회공연을 통해 모은 수익으로 춘천에 ‘굴레 소극장’을 개관하였다. 이는 당시 지역 연극계에서는 드문 사례였으며, 그는 “이제야 내가 하고 싶은 연극을 마음껏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한다.
이후 30년 넘게 소극장을 운영하며, 청소년극, 아동극, 시민 대상 공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 공연예술 생태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춘천연극제, 춘천마임축제, 춘천인형극제 등 문화예술 축제가 활성화되며 지역 연극 환경도 한층 활기를 띠게 되었다.
교사에서 연출가로, 연극에 대한 전념
그는 교직과 연극을 병행하다가, 1985년 제3회 전국연극제에서 《그대의 말일뿐》을 연 출하여 연출상을 수상하면서 교직을 사직하고 본격적으로 연극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후 청소년극과 아동극, 순회공연 등 다양한 장르의 연극을 통해 극단 활동을 확장하였으며, 지역 연극의 대중화와 창작 기반 구축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현실적인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아동극 《백설공주》 제작 당시 20명이 넘는 출연진에 비해 실제 관객 수는 10명 남짓에 불과했고, 제작비 부족으로 배우자가 결혼반지를 내어주었던 일화는 예술가로서의 헌신과 어려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1990년대 초, 철원 순회공연으로 《요술공주 밍키》를 공연하러 가던 중 차량 사고가 발생하였다. 사고를 수습한 뒤 철원 극장에 도착했을 때, 공연은 약 5시간가량 지연되었지만 관객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이 경험은 “예술이 사람과 사람을 잇는 감동”을 깊이 느끼게 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연극을 통한 인연과 가족
연극 활동을 통해 그는 극단 ‘혼성’에서 배우로 활동하던 현재의 배우자와 인연을 맺었다. 《정선 아리랑》 연습을 계기로 가까워졌고, 이후 《철부지들》 등 여러 작품에서 함께 무대에 오르며 가정과 예술의 동반자가 되었다.
그는 연극에 전념했던 만큼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 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은 그에게 “즐거움이었고, 고마운 존재였으며, 때로는 미안한 존재였다”고 말한다. 연극은 그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였으며, 자신이 살아 온 시간을 고스란히 증명하는 도구이자 인생의 중심이었다.
예술 철학과 대표작
이영철은 극작가 故김상렬 작가로부터 “연극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연극 철학을 배웠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그의 창작 활동 전반을 이끄는 원칙이 되었다.
그가 가장 애정하고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故 김상열 작가의 《그대의 말일뿐》과 《철수야》를 꼽는다. 그는 인물의 배경과 심리를 탐색하기 위해 신문과 잡지 등을 수집·연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창작의 몰입과 즐거움을 경험하였다고 밝혔다.
문화행정과 예술현장의 병행
2000년대에는 춘천국제연극제 이사장, 춘천예총 회장 등을 역임하며 문화행정 분야에도 참여하였다. 일정 기간 창작 현장을 떠나 문화행정업무를 보았으며 이후에는 다시 연출과 공연 현장에 복귀하여 지속적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회고와 후배에게 전하는 메시지
그는 후배들에게 “무턱대고 열정만으로 시작하지 말고, 자신에게 연극적 재능이 있는 지를 먼저 냉정하게 판단하라”고 조언한다. 때로는 빠른 포기가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연극의 끈을 놓지 않았던 그는 “연극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철학을 자신의 연출과 창작의 핵심 미학으로 삼아왔다. 이 단순하지만 강한 신념은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중요한 원칙으로 자리 잡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