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내 인생 문화의 꽃”생애와 연극 입문
오일주는 1970년대 춘천고등학교에 입학하며 연극과 첫 인연을 맺었다. 당시 춘천고등학교 축제인 상록제에서 故 김원림 연극반을 지도하는 열정적인 모습을 보면서 “기회가 된다면 나도 연극을 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품게 되었다고 회고한다.
이후 춘천교육대학교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연극 활동에 발을 들였다. 교사가 되어 학생들에게 희곡을 잘 지도하려면 연극을 접하고 직접 경험해 봐야겠다는 목적이 연극 입문의 주요 동기가 되었다.
춘천교육대학교에 입학하여 연극 동아리 극회 ‘석우’에 입단하였다. 열악한 연습 환경에도 불구하고 동료들과 함께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안개소리》(차범석 작)를 공연으로 무대화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한다.
극단 ‘굴레’ 창단과 지역 연극의 성장
1975년, 춘천교육대를 졸업하고 교사 발령을 기다리던 중 오일주는 극단 ‘굴레’의 창단에 참여한다. 굴레는 창단작품으로 《은하수를 아시나요》를 시작으로 《파수꾼》, 《방황하는 별들》 등 다양한 공연을 선보였다. 극단은 연습실조차 없이 운영되었고, 포스터는 단원들이 손으로 직접 제작하며, 무대 장치, 의상, 소품까지 자급자족으로 준비해야 했다.
1980~90년대에 접어들며 굴레는 춘천을 대표하는 극단으로 자리잡았고, 청소년극, 계몽극, 실험극 등 다양한 형식을 시도하며 지역 연극의 폭을 넓혔다. 오일주는 “극단에서 함께 먹던 라면이 제일 맛있었다”고 회고하며, 연극이란 결국 공동체의 경험이자 삶의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교사이자 연극인 – 검열의 시대를 살아내며
1980년대 군사정권 하의 검열은 공연 준비에 있어 가장 큰 장벽이었다. 지역에서 공연을 올리기 위해서는 군청과 경찰서에 사전 신고가 필수였으며, 정부 비판이나 외설적 표현, 급진적 주제를 담은 공연은 종종 금지되었다. 이 시기는 계몽적 성격의 연극만이 허용되던 시대였다.
그러한 시대적 제약 속에서도 오일주는 철원, 횡성, 인제 등 강원 각지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지속적으로 공연 활동을 이어갔다. 한 번은 공연 도중 극장 뒤편에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긴장했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고 회고한다. 다행히 해당 공연은 농촌 청년의 삶을 다룬 작품이었고, 별다른 제지 없이 무사히 공연을 마칠 수 있었다.
1990년대 – 김유정의 소설의 연극화에 물꼬를 트다
1994년 춘천연극협회장을 역임하며 지역 연극 활성화에 힘썼다. 그는 김유정의 소설을 《동백꽃》, 《봄봄》, 《만무방》, 《안해》등을 희곡화하여 무대에 올리며, 춘천의 문학과 연극을 잇는 작업에 주력하였다.
김유정의 문학에 많은 애정과 관심을 갖게된 이유는 1976년, 막 결혼식을 올린 故 이외수 작가가 김유정 문인비 앞에서 훌륭한 소설을 쓰겠노라 다짐하는 모습을 본 이후, 김유정이라는 인물과 그 문학 세계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고 회고한다.
또한 춘천연극협회장을 역임하면서는 협회 소속 회원들이 모두 참여하는 합동 공연으로 《맹진사댁 경사》, 《산국》 등을 무대에 올렸다. 이들 작품은 협업을 통한 탄탄한 무대 구성으로 관객의 큰 관심과 호응을 얻었다.
대외 활동과 민속극의 확장
교직 생활과 병행하면서도 오일주는 주연보다는 기획, 협력, 대외홍보 등 다양한 역할을 맡았고, 특히 타 지역 발령 이후 철원, 화천, 인제 등지에서 민속극과 마당극을 30년 넘게 연출했다.
현지 민속놀이를 수집하고 마당 공연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통해 지역 문화를 보존하고 계승하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감성의 언어로서의 연극
현재 그는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와의 대화를 바탕으로 한 희곡을 집필 중이다. 이 작품은 돌봄, 공감, 상실, 회복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담고 있으며,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동시에 자신의 연극 인생을 정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오일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연극은 내 인생의 문화의 꽃입니다. 그 속에 삶이 있고,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는 아직도 아름다운 소풍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