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수는 생전 연극 활동을 통해 삶의 열정을 표현했던 예술인이었다. 춘천농대(현 강원대학교 농업대학)를 졸업하였으며, 월남전에 참전하였다.
귀국 후에는 가족과 조카들을 돌보며 생계를 이어갔던 것으로 기억된다.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예술에 대한 꿈을 품고 있었으며, 특히 미술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으나 가정 형편상 진학이나 전문적인 활동은 어려웠고, 생업에 몰두 할 수 밖에 없었다.
예술 활동과 연극 참여
둘째 딸의 기억에 따르면, 고인은 생전에 강원도청 공무원으로 재직하였으나 이후 공직을 사직하고 인테리어 사무실을 운영하였다. 1971년 무렵 극단 혼성에 입단한 이후에는 주로 무대장식과 분장을 담당하였으며, 무대 예술 전반에 걸쳐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활동한 것으로 전해진다.
1990년대 극단 혼성의 미국·일본 등 해외 공연에 참가하며 무대미술로 상을 받은 일화는 자녀의 회상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연극을 향한 열정은 가족이 병원에 입원한 상황에서도 해외 공연을 떠날 만큼 강렬했으며, 이러한 예술적 집념은 때로 가족과의 갈등을 불러오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인의 둘째 딸은 “무대 위의 아버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고 회상하며, 교회에서 무언극이나 마임 공연을 하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된다고 말한다. 그 순간만큼은 고인의 내면 깊은 곳에 있던 예술가적 본능이 자유롭게 펼쳐졌던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예술가로서의 성향과 삶의 태도
고인은 유머를 즐기고, 지적인 대화와 예술적 표현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림을 잘 그리고 글씨체도 단정하여 미술적 감각이 탁월했던 것으로 기억되며, 연극 외에도 창작 전반에 흥미를 가진 예술적 기질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는 예술과 생계 사이에서 늘 균형을 찾아야 했고,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치기엔 시대의 조건이 너무나 가혹했다.
딸은 “늘 삶과 꿈 사이에서 갈증이 있던 그 모습에 죄송해진다”고 고백하며, 연극 무대야말로 아버지가 자신의 꿈에 조심스럽게나마 날개를 달 수 있었던 공간이었다고 회상한다.
가족의 기억 속 고인
고인의 연극 활동에 대해 자녀는 뚜렷한 기억은 많지 않지만, 어머니가 아버지의 연극 활동을 마냥 반기지만은 않았던 정황과 가족 내 갈등의 기억 속에서도 “연극 이야기를 할 때면 즐거워하셨던 얼굴”을 떠올린다.
비록 시대적 한계와 경제적 현실 속에서 꿈이 제약되었지만, 고인은 예술과 일상 사이에서 균형을 고민하며 묵묵히 자신만의 예술혼을 지켜온 인물이었다. 딸의 회상은 그가 단지 ‘연극을 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꿈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예술을 놓지 않았던 사람’이었음을 보여준다.
맺으며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남겨진 가족의 기억을 통해 우리는 고인이 연극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 했던 진심과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연극은 고인에게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마음속 꿈의 일부를 무대 위에 펼칠 수 있었던 유일한 창이었다.
그가 남긴 무대의 흔적은 기록보다 짧았지만, 기억 속의 예술가는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 본 내용은 고인의 직계 가족(차녀 김주희)의 회고를 바탕으로 구성되었으며, 자료가 부족한 상황 속에서 고인을 기억하는 비공식적 발언을 바탕으로 기술되었음을 밝힌다.
